목양 자료

목양 자료

요한일서에 나타난 사랑(9) "사랑의 훈련" (요일4:17-21)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52
조회
1610
<도입>
오늘은 지난 하나님의 신적 사랑이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살피겠다. 우리 삶에 두려움으로 파생된 무수한 문제와 증상들을 보지만, 그것의 뿌리가 두려움인지 모르기 쉽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복음을 믿고 외형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복음의 능력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아는 정도에서 정지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지만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야 자신의 인생을 복음의 생명으로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요14:27 “…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평안: 복음(사랑)의 능력이 내적/외적으로 질서를 이룬 상태
그래서 지난 시간에,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무기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보았다. Scott Peck “그리고 저 너머에” ?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믿음)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는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란 뇌가 손상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풍성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는, 두려움이나 고통 같은 부정적인 내면의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 함께 살면서도 극복할 수 있는 길과 능력을 닦아 나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원인과 증상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창3장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벗겨 놓으셨는데, 벗은 것이 왜 문제가 될까? 하나님을 떠나니까 자신을 감싸주고, 지켜주던 방패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덕택으로 받지 않아도 될 불필요하고 사악한 상처와 피해에 그대로 노출이 되니 두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지는 않고 자구책으로 나뭇잎 치마 만드는데 주력하는 삶을 산다.
내면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무서워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싫어진 것입니다(무서운 사람과 사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불편했고, 곧 하나님을 만날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다.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또는 양심의 마비가 온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적인 영역에서 수많은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변화가 따라온다. 한 예가, 아담과 하와의 경우 부끄러웠고 서로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웠다는 말은 서로 보기 싫은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됨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 하나됨은 언제나 생명을 지키고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단절은 언제나 죽음이다. 사람 사이에 단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감당 못할 아픈 문제들을 많이 일으킵니다. 지난 시간 리스트 참조.
이 두려움 때문에 발생하는 비성서적 인간의 성품과 습관들,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이고 인간 전체의 사악함이 막아지고, 해결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받고(체험하고), 우리도 또한 사랑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19절 이하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단절된 삶에 상처와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내게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입은 자의 두 가지 중요한 훈련: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 묵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기도는 말 없이, 또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과의 사귐을 돈독히 하는 시간이지만, 묵상은 내가 생각하려는 주제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것은 내게 좋은 생각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로 자기 내면을 정결하게 하고, 자기 생각과 신앙의 개념들(아이디어)을 정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랑의 훈련. 오늘 설교 제목.
올림픽에 참여한 선수들이 태릉 선수촌에 입단했다고 해서 저절로 수준급 선수가 되지 못한다. 선수촌에 들어갔으면 누구보다도 훈련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죽기를 각오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에 들어왔으면 사랑을 훈련 받으라고 있는 나라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날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만 추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자기훈련의 시간을 갖는 것. 오늘 날 우리들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을리 지내거나 빈둥거리고 싶어하며, 더 좋은 말을 쓴다면 ‘긴장을 풀고’ 싶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현대인은 자기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일의 리듬에 의해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8시간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하며, 그의 반항은 유아적 자기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현대인들은 훈련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무너지고, 혼란이 일어나는데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른다. 교회에서도 보면, 성경 훈련, 기도 훈련, 사랑의 훈련에 대해서도 그리 신뢰하는 것 같지가 않다. ‘사랑이 훈련으로 되나?’하는 의아심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맑은 정신 가지기. 말하자면 정신집중이 사랑 훈련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홀로 있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홀로 있기가 힘들어지면 타인과,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인터넷, 게임, 여가 즐기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사랑의 예비 자질이 갖추어지지 못하며, 사랑 받고 사랑하는 능력이 함양될 수 없다.
세 번째, 인내. 대부분 우리 인생에 성취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인내가 부족함이 첫 번째 원인일 것이다. 이것은 신속성을 요구하는 세상의 요청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구든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이루어내면 그것이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물질주의적, 기계적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훈련에 있어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각성이 있어야 하며 인내를 길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맺음>
사랑은 훈련을 통하여 함양되는 자질이고 능력이다. 사랑에는 보이지 않는 등급이 있다. 나의 경험으로 20대, 30대에 사랑하는 것과 40대에 사랑하는 것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실수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을 받는 데에도 훈련, 하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제가 앞서 말씀 드린, 자기 훈련의 시간 확보, 맑은 정신 가지기, 인내 등의 중요한 요소들을 기초로 사랑을 배워가는 중에 더욱 온전해지는 사랑은 그만큼 내 안에서 두려움을 몰아낸다.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길을 더욱 선명히 발견하고, 그 길을 인생의 최고 순위로 삼아 영광된 사랑의 풍성함으로 채워지시기 바란다.

<질문>
1. 사랑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게 할까요?
2. 두려움의 많은 증상들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십시요.
3. 사랑은 훈련되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피력해 보십시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