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목양 자료

특새(4) 성령: 삶의 긍정(고후3:17-18)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55
조회
1135
4. 성령: 삶의 긍정(고후3:17-18) [191장(내가 매일); 438장(내 영혼이)]
- 어제 우리는 성도의 참 회개의 중요한 두 측면, 마음의 전향과 몸의 변화에 대한 말씀을 살폈습니다. 몸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이 몸에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죄와 싸워야 하는데, 성령은 그 영적 싸움을 통하여 계속하여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께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싸우지만 예수님이 주시려는 생명의 부요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의 빛 안에서 죄를 직시하지만 자기 스스로 죄를 없애려 하거나, 직접 상대하지 않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가 그분이 풍성케 하는 생명의 참 가치를 누리는데 의지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1] 생명의 부요를 맛본다는 의미.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라서 무한대 차원의 풍요를 내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누리면 누릴수록 그 풍요는 더해지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을 부여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사람은 생명이 부요 해질수록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면서 왜 저것은 내 눈을 자극하면서 괴롭게 하냐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희망을 느낍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때, 자꾸 들으면 악기들의 소리가 따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 악기의 선율이 조화를 이룬 음악을 들으면 자꾸 더 듣고 싶어집니다. 그것에 매료되며 끌리고 참 좋다…(가치가 높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만이 아름다움과 선함에 매료되어 대상을 더 추구하고, 감동의 벅참을 누리고, 우정 안에서 교통하고, 자기를 버리는 희생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그러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자신 안에 예수 생명이 부요해지면 세상 무엇을 보아도 깊이 본질을 보려 하고, 느끼고,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가치나 표면적 성취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상 자체의 아름다움에서 가장 숭고한 가치를 회복시킵니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으로 가치를 정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아주 친밀한 관계, 즉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인 경우에도, 너의 너 됨으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체에서 기쁨과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항상 피상적이고 계산적인 관계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피곤한 사이가 되는 것이죠. 그 사람 자체가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기 때문에 종종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내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별 능력 없어 보이고, 심지어는 초라해 보여도 그의 본질적인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을 발견하고 그의 본질적 가치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야 참 사랑의 길이 열립니다. 그와 교통할 수 있고, 서로 실수해도 품어줄 수 있고, 그를 위해 나를 감수하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것을 추구하고 바랍니다.

[2] 생명의 부요함을 방해하는 요인

그런데 이 추구는 마치 교회 부엌의 개스 화로에 파일롯 불 같아서 이 불 정도로는 요리를 할 만한 화력에는 못 미치고, 개스를 공급하여 큰 불로 점화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인간인 이상 파일롯 불은 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겨우 불씨 수준만 유지하면 인생이 답답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수준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성취나 업적과 같은 표면적 자랑거리 같은 것들이 오직 본질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그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 기쁨 같은 것들로 차오르지는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에서 만나지 못하고 표면에서만 만남과 교제가 있으니까 생명의 부요함은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표면의 세계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만 머물게 하실 세계가 아닙니다. 깊은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개안이 필요합니다.

본질이라는 말이 매우 고상하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처럼 들리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본질이라는 말은 존재 속에 품고 있는 가치의 세계입니다. 어떤 것이 덧붙여지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도 풍성한 가치가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가 살아만 있어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그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할 때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아도, 그의 그 됨으로부터 참 가치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남편은 진실로 부요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맺음>

이런 본질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도 참된 의미에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에겐 깊은 안정과 흔들리지 않는 긍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또한 주변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 본질의 차원에서 만나고 교통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본문 17절) 진정한 자유 안에는 경이로움이 있고, 열정이 있고, 향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질의 세계에서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생명의 축복과 부요가 있는데, 그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어떤 유형의 탁월하고 화려한 조건과 자격도 본질 세계에서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진리를 보실 수 있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주신 예수 생명이 담긴 나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축복의 차원에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