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극복하기?”(합
- 인간은 피조물 중에 가장 지식과 지혜에 뛰어난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뭔가를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이 튀어 나옵니다. 사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뭘 모르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그 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매우 큰 피해가 닥치는 일을 당할 때,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일을 허락한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 성적으로 폭행을 당했다든지, 자기는 원하지도 않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든지, 하나님께 헌신하며 겸손하게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살았는데, 사고로 불구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비참하게 병상에 누워 여생을 살아야 한다든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죄사함 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 돌아가신 소설가
“나는 온종일 하느님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여지가 남아 있는 하느님,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그 살의를 위해서도 하느님은 있어야만 해”
-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 본문 하박국서에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나 큰 모멸과 잔인한 죽임을 당하면서 이들은 억울해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과 씨름이 붙었습니다. 엄청난 영적 난국입니다. 그래도 하박국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다고 달라지는 것은 여전히 없습니다.
F
그리고 지금 그 문제에 대해 풀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왜 그렇게 하셨어요? 아니 일부러는 그렇게 안 하셨더라도, 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어요? 사람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무리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어요?” 그렇게 따져도 아무런 반응이 안 보이는 하나님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런 하나님을 극복하실 수 있겠습니까?
F 이런 하나님을 극복할 수가 없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렘 20장) 만일, 우리의 자녀가 자기 생일에 대해 이런 저주를 한다면 부모 된 우리의 심정은 어떨까요? 듣는 입장에서도 거기가 벼랑 끝이라고 생각되지요. 사실 인간의 모든 극단적인 비참함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잔인한 책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등장하는 기이한 하나님을 용납하고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는 지금 이런 말이 왜 필요한지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에겐 정말 해괴한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F 성경의 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캄캄한 어둠의 동굴을 지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캄캄한 동굴이 우리의 삶에 뚫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랬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절망의 시간들을 지나면 끝내 어디서 희망이 보이겠습니까? 놀랍게도 절망의 끝이 보이고, 희망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곳이 하나님 안입니다..
F 이런 문제의 해결이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나에게 적의를 품으셨다고까지 생각했던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분이었고, 나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더 아파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고 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의 고통을 잘 이해하는 분도 없고, 그 분처럼 인간보다 아파하시는 분도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단련하신다고 할 때에는 내게 일어난 고통이나 절망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대부분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그 고통 중에 계시고 그 고통이 우리에게 삶의 희망으로, 또 살게 하는 힘의 통로로 선용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차원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도우심을 입고 산다고 말하기 보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다시 한번 깊은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말은 이제 하나님을 나의 진짜 창조주 하나님으로, 진짜 구속하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F 우리는 하나님을 다 모릅니다. 사실 몰라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확실한 것 한 가지만 꼭 붙들고 하나님을 아는 세계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용서와 사랑, 그것을 우리에게 확연하게 제시하고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붙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 인생의 모든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F 지금까지 우리는 용서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용서의 근원, 용서 해야 할 이유와 유익, 참 용서와 가짜 용서, 심지어는 내가 성숙해지면 상처의 텃밭이 제거되고, 용서의 대상 조차 사라진다는 것도 말했고, 오늘은 급기야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해괴한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용서에 관한 초점은 십자가로 모여집니다.
왜 그렇죠?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집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이시기로 작정하셨고, 거기서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점점 가중되는 혼란이 쌓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 줄기 빛이 십자가를 통과할 때, 다양한 용서의 빛 줄기로 갈라지고 퍼져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용서는 모든 인생의 용서의 근본이 되고, 동기가 됩니다. 이제 우리가 나가야 할 용서의 길이 보여야 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나눔의 질문>
1. 나의 인생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 분이 어떻게 하셨길래 극복이 안 되는 하나님이신가요?
2. 하나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하나님과의 고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꼭 그렇게 해보시기를 권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