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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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3) 용서에 대한 오해 (사43:25-26)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8
조회
1475
(아래 글 많은 부분은 송봉모 신부 "미움이 그치는 순간"에서)

지난 과에서는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 수 있었던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를 다루었습니다. 값싼 용서란 악이나 잘못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좋게 좋게 봐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용서의 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용서의 축복을 누릴 수 없게 합니다.

섣부른 용서란 서둘러서 성급하게 해주려는 용서입니다. 친밀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관계가 소원해지면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서 상대방을 성급하게 용서해 버립니다. 특히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용서와 화해, 일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강박관념을 가지면 이렇게 될 경향이 큽니다.

이런 용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하는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하기 때문에 신중히 성경적 용서를 잘 배워야 합니다.

이번 장에는 용서에 대한 오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가지를 살피겠습니다.

1. 용서란 몸과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닙니다. 온전한 용서로 나가는 과정에서 용서하겠다고 시작에 불과한 때에 우리의 용서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 먼저 용서는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서 의지로 결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걸리는 문제가 거의 이런 문제들입니다.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비추어, 이 정도는 용서가 아니라든지, 사랑이 아니라든지, 믿음이 아니라든지 섣부르게 결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윤리적인 높은 기준을 앞세워 설득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받은 상처가 매우 깊고 크다면 그만큼 아무는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긴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추행을 당하고 폭력을 당했을 때 입은 상처는 시간이 걸려야 아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올라올 때 해야 할 일은 나는 아직도 상대방 때문에 아프고, 자유로워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기 비판과 비난을 하게 된다면 가뜩이나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받아 쓰러진 마당에 한번 더 엎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2. 용서는 곧 화해다. 아닙니다.

- 어제 오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용서했다고 화해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화해란 쌍방의 합의입니다. 용서는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먼저 내가 준비되어야 하고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화해의 조건입니다. 저녁 예배 때 요셉의 경우에서 보셨듯이 요셉이 형들에게 용서의 마음과 자세를 다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그와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애매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화해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결과로 맺어졌는데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창세기 끝장에 이르기까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이 종종 있습니다. 굳이 상처 준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가 더 큰 실수를 입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공동체에서 한 자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아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자매를 멀리했는데 우연히 함께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봉사자가 되었는데 그와의 안 좋은 사이가 마음에 걸려서 용서하기로 하고, ‘우리 서로 용서하고 앞으로 잘 지냅시다.’라고 말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그래, 당신 잘못을 이제 당신이 알겠지?’라고 말해서 더 큰 상처를 받았답니다.

- 화해는 상당 부분 가해자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와 반드시 관계를 재개할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3.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 아닙니다.

- 용서했어도 과거의 상처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5절에서 ‘내가 너의 죄를 기억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글자 그대로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악행이 당신과 우리 관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26절에 가서는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라고 하시죠? 네 입으로 네 잘못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치러진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적 축복의 비범함을 인하여 더욱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벌려 놓은 죄의 행위에 대해서는 값을 치러야 할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행위 자체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용서하지만 상처 준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에 덴 사람이 불을 조심하는 것은 또 다시 불에 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은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정신의학자 사스는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4. 중독자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와 관련한 오해.

- 알코올 중독자,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 같은 사람들과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들에게는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치료가 필요합니다. 중독자나 병자한테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 사람이 신앙의 이름으로 참고 견디거나 묵인하는 일은 올바른 행위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값싼 용서입니다.

습관적으로 구타하는 사람, 언어적 폭력을 가하는 사람에겐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묵인하면서 ‘언젠가는 변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이 이것을 참고 견딘다는 것은 감정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폭력을 허락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행위가 됩니다.

- 습관적으로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아내가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질 났을 때 강아지를 걷어찬다면 그것은 강아지가 자신에게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친구에게 성질이 날지언정 주먹질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친구가 떠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에 대한 오해를 좀 풀어야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오해를 하면, 용서에 대한 강박감이 더욱 가중될 것입니다. 용서는 어려우면서도 쉽습니다. 이러한 양면을 잘 붙들려면 용서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례들(이해하기 쉽지 않은) 속에서 살아 가지만, 말씀드린 용서에 대한 오해를 잘 이해하면 담대하게 자신을 억누르지 않으며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눔의 질문>

1. 당신은 위에서 나열한 내용 중에 용서와 관련해서 새롭게 다가온 것이 있습니까? 용서에 대한 오해를 풀은 것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요.

2. 우리가 온전한 용서를 하고도 용서하지 못했다는 느낌의 찌끼를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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