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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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에 나타난 사랑(4) "사랑하는 자의 특권" (요일3:21-24)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47
조회
765
<도입>
인간은 모두 다 주님의 크신 동일한 사랑 안에 있지만 그 사랑에 깊이 매료되고 순응하는 사람은 더 큰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자원을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21-22절.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 과에서는 형제 사랑을 익히고 실행하는 자들이 얻는 특권에 대해 살피려고 한다.
[1] 사랑의 계명을 지킴
형제 사랑이란 예수님이 주신 최고 권위의 계명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그런데 우리의 형제 사랑이 진짜 사랑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요한은 주님의 진리 안에서 확신과 힘을 얻어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도 담대하고, 떳떳하다고 했다. 이런 확신 있는 사랑의 경험이 많아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형제 사랑이란 인간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인류는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 창조되었고, 인류는 형제 사랑이라는 연대적 결속력에 의해 바르게 서로에게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결속되기를 거부하면, 상호 간의 존중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요일3:12 참고)
우리가 서로 존중하지 않는 가운데 오래 머물면, 그 상태가 바르게 유지되지 않고 관계가 더 악화된다. 그래서 마음에 섭섭함이나, 상처를 입었더라도 형제애를 회복하고 바르게 결속해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강조이다. 오늘 본문에서 4번이나 거듭 ‘계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기억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형제 사랑이 그렇게까지 꼭 필요한가…? 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정수 속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죄의 선봉인 교만으로 나가게 한다. 진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대적하게 될 수도 있다.
[2] 형제 사랑에 반대 되는 길
자신의 자아의 기준대로 형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을 갖는 것, 이웃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본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과 선한 양심에 근거해서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결과는 형제 사랑의 반대로 나타난다. 사람은 신앙을 이용해서 자아를 강하게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과 일에 대해 부대끼는 일들이 많아진다. 늘 생각 속에 ~ 해야만 되는 생각의 기준이 끊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이 크고 작은 판단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교만(자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들어가 좌정하고 다스리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교만 속에서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 판단자이고, 주인이다.
프랑스의 행동하는 성자, 피에르 신부(빈민 구호 공동체 “엠마우스”의 창시자)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에서 자만과 형제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자만, 그것은 어리석게도 너 자신을 가득 채워, 너를 증오의 존재로 만들고 말 것이다. 자만을 미워하라. 그것에 빠지면 너는 그것으로 인해 너의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너도 죄를 받을 것이다.
죄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자만은 숙명적으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잔인하지는 않지만 어리석고, 비열하고, 하찮은 외로움, 사람들은 이 앞에서 단지 침묵하고 어쩔 수 없이 견딜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유일한 존재방식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중략)
거만한 사람은 사랑을 모독한다… 거만은 추악하고 교활하다. 그것은 고독을 낳고, 사랑에 이르기 어렵게 만든다. 거만이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패거리 의식’이라 부른다. 패거리 속의 각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 또한,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고 하므로 사랑을 베푼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일정 정도까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만을 위한다. 그 외의 사람들은 자기와는 무관한, 잘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형제 사랑을 방해하는 교만의 가능성은 항상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 사랑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로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행함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교만의 성을 깨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깨고 나갈 때, 오히려 큰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향유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22절)는 말씀을 보았다. 자기 유익을 위한 이기적 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사랑의 진정한 행함이 실현되는 새로운 삶을 위해 그 사랑이 완성되기에 필요한 것을 구함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 요15:7 “…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맺음>
사랑은 이 땅에서부터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축복이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차원으로 돌입하는 길이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자원을 잘 공급받고 있는가? 하늘의 공급을 받기 위해서 진실로, 겸손하게 구하고 있는가? 이것을 위해 교만/자만을 지극히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소중한 영원성, 또 사랑이 생명의 핵심 가치라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내적 성품과 외적 행함을 포함한 총체적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가장 큰 힘이 된다. 삶의 목표를 형제 사랑에 고정시키고 살기를 간구한다면 사랑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삶에 더 구할 것이 없는 하늘의 축복으로 채우실 것이다.

<토의와 질문>
1. 진실한 형제 사랑을 위하여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요. 무엇을 구했었는지 경험이 있다면 비추어 말씀해 보십시요.
2. 형제 사랑을 위한 나의 필요를 구할 때 얻는 특권을 가진 신자로서 나의 삶이 신앙의 세계로 선명하게 열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3. 형제 사랑을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형제 사랑이란 부부간, 부모 자식 간, 친구 간 등… 모든 인간 관계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나의 가족 사랑을 더욱 진실하고 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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