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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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신 예수님(1) - 찾아야 할 분(요1:35-39)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26 20:41
조회
411
[1]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20:31 “오직 이것(자신의 글)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마태/마가/누가복음보다 약 25~30년 정도 늦게 쓰여졌습니다. 한 세대 정도의 시간 차이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오순절 교회 탄생과 부흥 그리고 이방 땅으로 나아가 세워진 교회를 수십 년 지켜보았습니다. 교회는 당시 헬라 문화의 강한 영향력에 결탁되고 혼합되는 과정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의 이런 과정들을 약 60년 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독교의 진수를 다시 가르치기 위해 요한 복음을 쓰게 된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는 생명(영생)입니다. 이 생명이란 사람이 창조 때부터 누리도록 디자인 된 숭고한 영적 차원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중앙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만나고(3:16) 서로 사랑하는 삶이 실현될 때(13:34) 고귀한 생명을 살 수 있음을 다시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두 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참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을 아는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배우고 사랑할 때에 참 인간됨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요한복음의 주요 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정보 습득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보가 힘인 요즘 시대에 진정 추구해야 할 지식은 참 사랑에 대한 경험적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참 사랑의 진리에 접근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우리가 찾아야 할 예수님

침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메시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따라오는 그들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예수께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니고데모, 왕의 고관 등). 요한복음에는 ‘찾다’라는 동사가 30번 정도 나오는데 이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인간의 깊은 속성을 말해줍니다. 무언가 찾고자 하는 인간의 태도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하나의 키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또 다른 중요한 키는 인간의 필요의 현장에 예수님이 이미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은 이미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필요가 무엇이든지 그 필요를 통해 궁극적 생명(영생)의 길로 초대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필요로 인해서든지 예수께로 진지하게 나아가면 결국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의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됩니다. 사람은 잘못할 때에도 사랑이 필요하고, 잘 할 때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에도, 나이가 들어서도, 남자든, 여자든 모두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생의 세계를 깊이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3] 와서 보라

사람의 타락은 영원한 생명이 사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지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은 당신(당신의 사랑)을 직접 경험해 보라는 초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기독교 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그분을 직접 만나고 교제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도 자신을 체험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께로 와서 친밀한 사귐을 갖자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누구보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잘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받아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체험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디보다 덜 훌륭해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전부라고 의탁하고 투신하며 사귐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녀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윤리와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알지 못하면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39절. “와서 보라” 이 초대에 응한 제자들은 그 날 함께 거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안에서 거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가 ‘거함’ 입니다. 서로 안에, 즉,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 사랑의 인격 안에 거하는 사귐의 방식을 가르치는 말이고, 이 거함 속에서 우리는 참 진리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맺음>
우리는 진리를 갈망하며 찾고, 예수님은 이미 찾아오셔서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당신과 사귐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체감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열매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10:10) 마지막으로 권면 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나눔의 질문>
1. 요한 복음의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참고: 요3:16; 13:34]
2. 이 중요한 요한복음의 선포가 나의 삶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까?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에 자원하며 응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삶의 궁극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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