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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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2) 참 용서와 용서 아닌 용서 (창50:15-21)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7
조회
1961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죄를 안 짓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이다…” 송봉모 신부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자기가 죄를 안 짓는다고 하지만, 글쎄요…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톨릭에서 고해성사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맡은 어떤 고해 신부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또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죄를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끌어 안고 살다가 그대로 죽어 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었던 상인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의 가게가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하면 저 집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이들을 화해시키시려고 한 쪽 상인에게 보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큰 선물을 내리실 것이니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당신이 받는 선물의 두 배를 다른 쪽 상인이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금화 100개면 그는 200개를 가지게 된다는 것. 그러면서 천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화해하라.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크게 한숨을 쉬고는 결심하고 말했다.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인간은 본성적으로 용서하기를 즐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복하고 싶어합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 저 사람이 분명히 잘못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면 이 세상에 정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 ~”~ 마치 저 사람의 잘못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 ~”~ 내게 벌어진 비극을 되돌릴 길이 없다.
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음. 용서하면 내 자존심을 회복할 길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소한 상처도 사실 견디기 힘든데, 끊임없이 상처 주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달마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용서하기가 참으로 힘든 이유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하되 용서 아닌 용서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하고 참된 용서를 해야 합니다. 오전에 말씀 드린 대로 참 용서를 하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배워서 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요셉이 용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 속에서 결국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 일을 당하게 되어서, 형들에게 큰 상처를 당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고서 애굽 총리가 되었을 때,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형들이 식량을 얻으러 자기들 발로 걸어 들어 온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이렇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들을 용서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들을 용서할 마음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나고 나서 고민하다가 용서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은데 사실입니다. 시 105:16-19(읽음)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데, 그 훈련 받은 곳이 발이 차꼬(착고)에 상하고 몸이 쇠사슬에 매인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요셉에게 왜 하나님의 혹독한 말씀의 제련이 있었을까요? 그의 마음 속에 자연적으로 파고든 형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일어나 그의 내면의 삶이 그런 부정적인 것들로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이까?(39:9)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면서도 요셉은 형들에 대한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나에게 심한 모욕이나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늘 불편하고, 펼 수 없는 마음 상태에 있으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매우 잘 의식하고 그 분 앞에서 삶을 잘 추스르는 그런 모습들이 있겠죠.
그런 끊이지 않는 내면의 문제가 감옥 생활 하며 고독과 묵상의 삶 속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성령이 임하여) 요셉의 분노하고 원한이 쌓인 마음의 창고를 깨끗이 치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셉에게 이것이 축복이었을까요? 저주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상처로 말미암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를 정돈할 때, 시간이 적게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들 10명에 대한 개별적 감정은 엄청나게 날카롭고 모나게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막상 그 형들을 만났을 때 그에게 용서하고 말고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숙제는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과 자신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이들과 온전히 화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지금 그들과는 견줄 수 없는 사회적 지위와 부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 요셉이 그냥 자기들을 용서해준다고 하면 이 형제들은 지위와 부에 눌려서 천박한 종의 근성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과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동등한 형제로서 자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으려면, 형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것을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치를 것은 정당하게 치러야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는 형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용서를 배운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과의 궁극적인 관계까지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용서로서 매우 숭고한 용서이죠.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내 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 로마 병정들보다 낫지 않다는 성령의 깨우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그런 혹독한 죄로 그 분을 배반하고 모른다하며 살아왔다 할지라도, 훗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죄송해 하고, 죄책감에 눌려 기죽고, 천국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 마치 종처럼 대하는 그런 비굴한 내면이 깨끗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을 나눠 주시고, 부활의 생명과 함께 얻은 신분이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형제라고 부르게 하시고(히2:11), 또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당신의 친구라고(요15:14)도 불러 주십니다. 우리로서는 황송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누구 앞에서보다도 자유하고 평강을 누리고, 자신감 있는 삶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축복입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과 은택이지요.
요셉은 이렇게 참 용서를 배우고 형들에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냐 하면 그 형들입니다. 요셉의 이런 진심은 형들에게 전달된 듯 한데, 그들은 여전히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 미천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본문 16, 17절(읽음). 아버지를 빙자하여 이들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요셉에게 어떤 용서를 구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면, 요셉이 왜 비통한 심정으로 통곡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이런 몇 단계 앞서서 이루어져야 할 화해를 향해 가지고 있는 용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기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들을 모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값싼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값싼 용서란 악이나 잘못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좋게 좋게 봐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들의 잘못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정당한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감히 바라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들먹이고는 아버지 후광으로 자신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모면코자 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해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형들도 인간인데 결함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결국 다 상처 받고 자란 우리들인데, 그냥 넘어가 주지 뭐… 잘못은 알지만 미숙해서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애써 좋게 봐주는 태도가 값싼 용서이고 용서 아닌 용서입니다.
참 용서는 잘못과 악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 참 용서를 하려면 내가 상대에게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향한 유죄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20절. 이것은 형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전혀 아니죠. 그러나 요셉은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값싼 용서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는 내게 상처 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상처가 될만한 일이 아닌데, ‘나 상처 받았어. 너 유죄야! 그러나 내가 참 용서를 베풀어주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죠? 쉽게 사소한 것에도 상처 받는 사람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저물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용서만 하고 살기도 바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전에도 잠시 언급한 문제인데 주 중에 금요일쯤 한번 다루겠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원했던 용서는 섣부른 용서였습니다. 서둘러서 성급하게 해주기를 원하는 용서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하루 하루가 너무나 불편하고 조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으로부터 뭔가 빨리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물론 요셉은 이미 용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우리의 경우 용서의 마음도 안 갖춰지고 아직 사태 파악이 정확하게 되지 않았는데, 용서를 하게 되면, 분노와 아픔은 억압되고, 그것은 더 강력한 파괴적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섣부른 용서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뉘우칠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그런 잘못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에는 부담이 되고 고통스러워도 성급히 용서하지 말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숙고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 드린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가 있었는지 또 그것을 구하고 싶은 우리의 심리가 있었는지, 우리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는데 이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잘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참 용서와 용서 아닌 용서가 있습니다. 참 용서의 실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용서에 대한 오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참 용서가 무엇이고, 우리가 잘못 이해한 용서에 대한 부분을 아셔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용서의 사람으로서 한걸음 더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눔의 질문>
1. 요셉의 참 용서 실행에 대해 자기 말로 풀어서 설명해 보십시요. (교재를 보면서 하지 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말씀해 보십시요.)
2. 당신은 값싼 용서와 성급한 용서를 합니까? 이러한 용서 아닌 용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며, 부작용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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