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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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1) 하나님께 배우는 용서 (눅23:33-38; 엡4:32)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6
조회
1683
어떤 사람이 찡그리고 무언가를 먹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새빨갛게 달아 올랐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그 사람 옆에는 매운 고추가 수북이 쌓여있는데, 그 고추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더욱 고통스러워 하면서 계속 고추를 먹습니다. 보다 못해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매운 고추를 계속 먹는 것이요?” 그 남자가 자기 말을 내뱉습니다. “혹시 단맛이 나는 고추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행여 단맛이 나는 고추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운 고추를 계속 먹다니 미련한 사람이지요? 우리가 언젠가 누구로부터 받은 상처와 피해를 계속해서 자기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계속 떠올리고 분해하면서 “이렇게 계속 원한을 곱씹으면 언젠가는 풀릴 날이 있지 않겠소?”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분노가 일어나면 화를 내야 풀린다고 믿습니다만,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 할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나 사건 때문에 받은 피해와 아픔, 상처는 용서라는 복된 길을 통하지 않고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용서의 길이 성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 용서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를 다시 한번 상고하고, 다음 시간부터 구체적인 이슈들을 말씀을 통해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중심에는 용서라는 선명한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이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자기 혼자 도를 닦아서 이를 수 있는 지고한 단계의 용서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란 반드시 그 용서의 대상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용서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2. 용서는 본인이 피해를 받고 아픔과 상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아무런 상처가 안 된다면 용서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상처 받을 일도 아니고, 아파할 일도 아닌데, 불필요하게 분노하며, 용서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 수 있는데, 이런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에 다음 시간을 통해 따로 취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용서에 대한 단순한 두 가지 전제를 제시해 놓고 다음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가 없다면 서로에게 용서라는 말은 개념 조차 없을 것입니다. 수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어느 한 별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이 서로 싸우고 피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그들 서로가 용서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지언정, ‘우리는 너희가 그렇게 싸우는 것을 용서한다’, 이렇게 말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은 그런 의미에서 과연 가깝고 실제적입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고, 우리를 하나님 밖에 버려두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당신 품에 두고 당신과의 따뜻한 교제 속에서 살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간절하신 분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날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생명을 얻게 되면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자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창조주-피조물의 관계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자녀의 관계이며 때로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의도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려면 당신이 피해와 아픔을 입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피해를 입힌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말씀이 두 개 있는데,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당신께 부탁 하나이다”라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였고, 또 하나는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를 모함하고, 배척하고, 고통을 주며, 멸시하는 자들을 위한 용서를 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비신 이유는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 본인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매우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관점 중에 하나는 인간의 죄악이 여실하게 폭로되고 실행 되어서 하나님께 큰 슬픔과 아픔을 드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낭만적인 차원의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여실하게 드러나는데 그 죄란 이기심, 무자비한 잔인성, 집단 폭력, 냉소와 멸시, 악한 마음 따위가 다 터져 나오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불법을 저지른 한 인간 예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을 소멸코자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과 싸우시면서 또한 동시에 그 죄에서 인간을 건져내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혈투의 구원인 것입니다. 죄가 없는 곳에서 무엇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고, 무엇을 이긴 부활이라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피해를 당하셨으니 용서하실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정직하십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저들 인간이 하나님께 밀어붙이는 피해가 심히 크다는 뜻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지 인간 사이에서 죄를 짓는 일도 서로에게만 아픔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죄도 하나님께 더 큰 아픔과 상처를 남겨드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일그러진 형상이라는 내용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인간은 어쩌다가 이런 육체를 가지게 되었고, 어쩌다가 이런 마음의 세계를 가지게 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창1:26의 중요한 말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런 육체를 가졌고, 이런 마음의 세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잘 다스려지고, 옳은 방향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통하는 인간 영혼이 살아나야 하고,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영혼의 존재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말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그 형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고귀한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31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는 보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고상하고 위엄 있는 성품과 능력과 지혜와 안목이 인간 안에 최대한 담아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뜻과 생각과 자기 힘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의도에서 이탈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이 파괴된 채로 지속되면 인간의 꽃은 피어나지 못하고, 비틀어지고 왜곡된 채로 사단의 사주를 받고 매우 큰 죄의 세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

따라서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놓으신 인간에게서 그 분의 형상이 일그러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매우 비통해 하시고, 슬퍼하실 일입니다. 그 분의 사랑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것이며, 급기야는 그 분을 몰라보고, 자기 생각과 룰의 정당성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 중에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일을 합니다.

능력있는 어떤 못된 인간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유약하고, 힘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께 이렇게 치명적인 아픔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이러한 생생한 죄의 실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크신 분이고, 사랑과 은혜가 무한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은 상처 하나도 안 받으시고, 모든 것을 너끈히 넘길 수 있는 분으로 여깁니다. “너희가 무슨 죄를 짓든 난 괜찮다. 내 신경 쓰지마…” 이런 의도를 가지고 쓰여진 글귀는 성경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아픔과 슬픔을 묘사하고, 그 분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합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 아래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이후로 800-900년 정도를 말씀을 벗어나 크고 많은 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이 아프고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기에 이르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두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렘4:19-22(읽음)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의 행동과 삶의 방식은 이렇게 하나님을 슬프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께 피해를 입히고 상처와 아픔을 준다는 이야기를 길게 드렸습니다.

<이제 이런 비통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 이런 고통으로 아파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인간과 다른 점은, 악한 마음이나 보복을 꾀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가격한 인간들이 진정한 자유와 평강의 능력 가운데 참 인생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당신 품으로 불러 들여오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자를 하나님의 선하신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크게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하나님에 대해 자유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행위가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은 상대가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든 안 들이든 간에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평안하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주고 내주는 일입니다. 표현이 은유적이죠?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을 용서했다면, 자존심이 해제되는 것이요, 대립각이 무뎌지는 것이요, 냉랭한 벽은 따뜻함으로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평안 속에서 그를 위한 배려의 마음을 확보해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용서의 축복을 누리려면 가해자가 회개하고 그렇게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해야 용서가 실제화 됩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마음과 용서의 자세를 모두 갖추고 계시지만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취하고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닌 회개를 조건으로 하는 조건부 용서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이나 회복 없이 무조건 너는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시는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이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은 모든 인류에게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선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당신은 큰 용서의 마음과 배려를 가지고 계심을 알리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예수님은 늘 깊이 새기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극한 고통과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용서의 마음이 실현되기를 염원하셨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거기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버지는 모른 척하면서 계속 화가 나 계셨는데, 예수님이 용서해달라고 하니까 마음을 바꾸어서 용서해 주신다는…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의 뜻을 품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하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던 스데반 집사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선 친히 기쁘게 응답하셨고, 오늘 날 우리 신자들은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참된 기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이미 용서의 마음과 태도를 견지하고 계셨고,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기로 작정하셨다.

2. 이런 아버지의 뜻을 새기며 사셨던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용서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사셨고, 그래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십자가에서 기도하셨다.

3.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하나님께 피해와 아픔과 상처를 입힌 자리였지만, 거기서 바로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이 십자가에 드러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면 바로 용서의 은택을 입게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 중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고 상처를 준 가해자가 있어도,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새기고, 동일한 용서의 정신으로 무장되었던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의 마음을 먼저 배우고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떻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나의 죄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입으셨으면서도 나를 당신의 선하신 세계로 이끌어 주셔서 내가 그 분 안에서 사랑과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발견하고 배우고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알아야 용서의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상대에 대해 용서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상대가 회개한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고 그와 화해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잘못을 모를 수 있고,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나를 피해 다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용서의 마음을 갖는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지 쌍방의 합의가 아닙니다. 용서 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화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하라고 하시기 전에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시하시는 바는 내가 그에 대해 용서의 마음을 분명히 회복하였느냐에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경우들은 다음 시간들을 통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민족을 압제했던 일본, 용서했습니다. 동족 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게 했던 배후자들, 또한 모두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식탁에서 밥을 늘 같이 먹는 가족이나 한 공간에서 지내는 친구는 용서하기가 힘들다는 그런 말입니다. 용서의 대상은 늘 가까이 있습니다. 한 공간 안에 있고,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곳에 있습니다. 그런 대상들에 대해 자기 힘으로 용서하려다가 지치지 마시고, 오늘 말씀 드린 내용 속에서 다룬 피해자, 즉,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발견하시고, 묵상하시고, 배우시고, 용서의 삶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눔의 질문>

1. 나는 내게 피해와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했습니까?

2. 내가 하나님께 피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3.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기 전에, 나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 무엇을 구체적으로 배워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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