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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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2)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정신을 잃은 사람"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1
조회
1400
본문: 눅15:25-32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정신을 잃은 사람”
-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거의 모두가 한 가지 포인트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눅15장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등장하는 이 비유는 각각의 아들에 대해 두 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에 관하여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 대해 바른 정신을 잃은 사람의 예로써 큰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좀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 이 큰 아들은 어제 말씀드린 드라크마 비유에 비추어보면 자신의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잃은 드라크마가 자신의 중심성을 확고히 하고, 자기를 온전하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도 안 해보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큰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의 자리를 원칙과 율법, 그리고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기 위한 자기 성실로 대치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비유의 끝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엇을 잃은 사람인 줄 모르는 사람의 표상으로 남습니다.
이 큰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아들로서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단지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원칙에 따라서만 잘해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열심히는 하는데,왜 일을 해야 하는지, 왜 봉사해야 하는지, 자신의 자리가 어떤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위치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단지 성실하고, 거짓말 안 하고, 어떤 규범에 따라 일하는 사람이라서 자기는 죄 안 짓는다는 것에 당당하고, 겉으로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 큰 아들의 시험은 언제 오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 못할 때입니다. 큰 아들의 경우 자기 동생인데도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칙, 즉, 율법주의의 밧줄에만 매달려 사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상당히 거스리는 자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계산에 넣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언급한다면, 이 큰 아들은 성적으로 매우 억압이 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동생이 아버지 유산을 먼 나라에 가서 탕진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사업을 벌이다가 사기꾼에게 당해서 망할 수도 있고, 경험이 적고, 수완이 따라주지 못해서 망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놀음을 할 수도 있고, 비싼 취미 생활을 하다가 돈을 다 써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말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상상입니다. 자기가 억압하고 있는 부분이 동생의 잘못을 비난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 이 큰 아들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좀 드렸는데, 이 아들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원칙 고수적인 성향, 율법주의의 성향 때문에 자신의 성품 속에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아버지의 기쁨을 잃었고, 동생에 대한 긍휼을 잃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을 잃은 것입니까? 아버지와 진심 어린 생명이 교통되어야 할 관계를 잃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형제에 대해서도 이 아들의 관계성은 파괴되어 있습니다.
- 큰 아들의 강박은 ‘죄를 짓지 말아야 돼’ ‘아버지의 집에서는 룰을 잘 지켜야 돼’ ‘그렇게 살아야 성공하고잘 사는 인생이야’ ‘나의 이런 성실한 삶에 대한 대가는 언젠가 분명히 돌아올 것임에 틀림없어!’ 이렇게 믿고 사는 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아버지가 마땅히 베푸실 수 있는 동생 환영 잔치를 보고 격분해서 들어가지도 않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원칙주의자들은 무르익은 어느 순간이 오면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못 견딥니다. 결국은 존경하는 아버지도 못 견디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께로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어김이 없다’고 한 이 말! 무서운 말입니다. 내게 어김이 없다는 말은 누가 해야 할 말입니까?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자기가 어김이 없다고 이미 판정해 놓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틀린 것이 뭐 있어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는 지금 하시는 일이 매우 불공평하고, 부당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분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동생보다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서러움. 아버지의 기쁨과 보람을 자기 기쁨과 보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관계는 아버지와의 생명의 교통을 자신의 삶의 동력으로 받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 이것이 원칙주의, 율법주의의 해악입니다. 이 큰 아들은 어김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지 않니?”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김이 없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진가를 모릅니다.
그 진가를 모르고 살면, 언젠가는 이해가 안 되는 아버지에게 대들고, 아버지는 부당하며, 엄청나게 잘못 행하시는 분이라고 반항합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에 대해 엄청난 교만의 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결국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겸손과 아버지와 함께 하며 살아왔던 자신은 온유의 성품에 길러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 큰 아들의 이야기 정리:
o 원칙주의와 율법주의로 자신의 성실함(29절)을 가꾸어 온 삶을 살아왔음. – 이것이 자기의 자랑이고 공로(29절). 자신의 존재감은 아버지가 세워주신 그 존재감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살아냄으로서 키운 존재감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함.
o 이런 원칙은 동생을 정죄하는데 결정적인 사유가 되며, 정당성이 세워진다.
o 아버지께서 정죄해야 할 동생을 환대하시는 것에 대해 이해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동생을 맞이한 아버지의 기쁨을 받아서 자기 기쁨으로 삼지 못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생명의 교통이 없었던 자신의 삶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o 그 결과 아버지께까지 대들고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것이 그의 삶의 신념이고 동기이다. 이렇게 원칙주의와 율법주의는 자기 틀에서 벗어나면 무엇이든지 불사하고 하나님께 대해도 맹렬한 교만을 일으킨다. 다시 본문의 비유로 볼 때, 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단절된다(또는 더 자라지 않음). 동생과 비교함으로써 열등한 존재감의 소유자로 전락되고,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보여왔던 장남에 대한 신실하심과 배려있는 마음까지도 전달받지 못하여 아버지와 형식적이고 유익없는 관계로 전락한다.
맺음: 우리가 아버지 집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마음과 기쁨과 보람을 그 분과 함께 느끼고 즐기지 않으면 잃게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원칙은 좋은 것이고, 더 나아가 율법 또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의가 되면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잃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오리무중 속에서 많이 속상한 일이지요. 우리 모두 이런 뒤엉키는 삶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 나는 내가 지키고 고수하는 신앙의 원칙과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 속에서 그 분의 긍휼과 기쁨과 보람이 내 삶에 전달되지 않고, 내 식대로만 살고자 한다면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을 분명히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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