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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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3) "사람에 대해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2
조회
1187
본문: 눅10: 29-37 “사람에 대해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사마리아인)
<도입>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은 29절과 37절에서 말하듯이,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구약 배경 속에서 이웃이란 자기 동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동족 유대인이 아니면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 백성들은 유대 영토의 한 치 밖에 있는 이방인들도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시에 실제로 회자되던 일을 예수님께서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리고로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거의 죽도록 맞아서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도 그를 지나쳐 가고, 레위인도 지나쳐 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그를 만나서 치료해주고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3살짜리 어린 아이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피해를 입은 자에게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게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졌는가’ 입니다. 그것은 본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33절. ‘…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절.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 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곧 실행하는 행동이 바로 참된 이웃이 되기에 만족한 조건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자비를 베푼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마음뿐 아니라 상대의 현재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자비란 마음과 행동이 함께 따라야 성립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과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면 많은 이들은 두려움, 거부 반응, 무서움을 느낄 것입니다.
-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절대로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인지상정이라고, ‘참 안 됐다’는 마음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행위까지 베풀어 그를 돕고 채워주어야 합니다.
- 엡4: 32에서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타인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것은 둘째 치고, 불쌍한 마음조차 안 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마음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에 대해 친밀함은 커녕 무관심과 무정함, 그리고 적개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집이나 교회를 불쑥 찾아오면 먼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또, 누가 범죄를 저지른 것이 뉴스에 나오든지, 또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귀에 전해지면, 그 때문에 기분이 먼저 상하고, 괘씸하고, 정죄하며, 적의를 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상대적으로) 의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일차적으로 범죄자들에 대해 자신이 상대적으로 더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는 죄인이긴 하지만 그 보다는 나은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 자기의 내면의 불의를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범죄자들에 대한 이해나 동정심은 일부러라도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입니다.
- 공동체에서 까칠하게 구는 사람이라든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의 고통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을 헤아려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대부분 잘 해야 무관심으로 그치거나, 혹은 그런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피해다니는 것이 쉽상인데 그것은 너무 미숙한 수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과든, 교제가 길어지면서 가장 확실하게 터득해야 할 것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가 무능하고, 가진 것이 없고, 건강하지 못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서도 불쌍히 여겨야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불쌍히 여김을 받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깊이 동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우정이 오래 지속되면서 향상하려면 재미난 것이 많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자식에게도, 부모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이 사귐을 가지면서 어떤 단계에 이르렀을 때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사랑의 깊은 사귐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진심의 눈을 가지고 보면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 그런데 어떤 때는 남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면 기분 나빠합니다. ‘나를 뭘로 보는거야?’라는 식입니다.
또 어떤 때는 남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딱하다… 이 말이겠죠?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상대도 내가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 때 참 이웃이 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모습으로 성숙해져 가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남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고, 자라면서도 그런 마음이 진정한 사랑과 우정과 깊은 사귐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되지 않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잘 못합니다. 왜일까요? 그가 불쌍히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행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간에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화목이 기대치만큼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주장하고, 옳다고 자신을 내세우면, 나는 더 옳다고 하며, 나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이라고 맞서지 말고, 그런 상대를 불쌍히 여기십시요. 자신이 상대보다 더 높고, 우월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저 사람의 내면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 얼마나 저도 힘들까? 라고 생각해 주십시요. 이것이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기초 중의 하나입니다.
못된 성질 부리는 자식이나 공동체 식구들 보면, 처음에는 밉다가도, 어느 정도 지나면, 저렇게 밖에 안 되는 저사람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를 향해 치켜 세웠던 눈초리가 다시 온화한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 그런데 남을 불쌍히 여기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님의 자비를 발견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아, 내가 너를 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안다. 내가 도와줄께’ 우리는 진정한 사마리아인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찾지 못했던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내 안에 채워져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우리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그 진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야 사람에 대해 바른 정신과 바른 태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기도> 타인을 불쌍히 여긴다는 마음과 행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모든 사람이 불쌍히 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요소이고,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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