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목양 자료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4) "잃었다가 찾은 미래"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3
조회
1170
본문: 눅15: 11-24 “잃었다가 찾은 미래”
-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여러 측면에서 교훈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 아들은 먼저 아버지에 대한 패역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패륜입니다. 두 번째로 아버지로부터 얻은 유산을 탕진하고 방황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떠나 자신의 뜻으로 삶을 꾸리다가 망한 것입니다. 즉, 죄의 값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이 아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미래를 잃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 우리가 미래를 잃었다고 하는 말은 매우 애매한 말 중에 하나입니다. 미래가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잃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현재에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는 찾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현재의 중요성> 어느 시대에나 누구이든, 그가 어떤 미래를 향유할 것인가는 현재에 자기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주어진 시기에 무엇을 해야할지 마음은 안 잡히고, 방황하게 되면 먼저 정신 건강부터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든 의미 없게 느껴지고, 얼마 하다가 포기하게 되고, 또 공허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치 없는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꾸준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은 나중에 뭐가 되도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한 분야에 하루에 3시간 10년을 애쓰면 전문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엇 하나를 얼마나 인내를 가지고 하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문제> 본문에서의 이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주어진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집에 있는 이상 어떤 일도 자기를 기쁘게 해 줄 것을 믿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사실 집안에서부터 그의 방황은 시작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의 비호 아래 있는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는 일을 찾고, 재미를 붙혔다면 그의 방황은 먼 나라로까지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먼 나라로 떠났기 때문에 방황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아들은 과거부터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방황했습니다. 장소에 대해서는 멀리 떠나있든, 집에 남아 있든 상관 없습니다. 진정한 미래에 대한 보장이 현재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 아버지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 아버지와의 영적 동거함에 있다는 것을 체득하는 데 있습니다. 지난 번, 큰 아들의 경우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는 아버지가 계신 집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향해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미래의 성격> 그러면 미래에 대해 어떤 측면이 구체적으로 강조되어야 할까요?
- 먼저 인간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은 축복입니다. 미래의 의미는 단순히 지금 이후에 올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시간만 지나간다고 오는 미래는 진정으로 미래가 아닙니다. 그 미래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느냐와 어떤 격상된 수준에서 향유되는가가 진정한 미래의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행복과 연관될 것입니다. 즉, ‘어떤 내용의 미래가 행복할 것인가’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할 것이며, 또, 눈에 보일 어떤 성취를 향해 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진정한 행복과 결탁된 미래는 ‘내가 좀 더 영적 교류로 인한 내면과 성품의 더 나은 소유자가 될 것인가’를 인지하는 것 입니다. 포용력과 배려, 이웃과 세상을 향한 이타적 성향, 내적인 미의 추구와 누림, 더 사랑하고 더 사랑받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내 진정한 미래가 찾아오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래는 내가 단순히 바란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배우고, 깨우치고, 현재의 실전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떼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등산 할 때, 정상 위에 서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쁠까? 무작정 이런 바램만 가진다고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 문을 나서면서 산을 향하는 첫 걸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씩 갈 때에 인간은 자신의 자원만으로는 정상까지 도달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미래로 나가게 하는 현재 얻어야 할 자원>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베풀어지는 내적/외적 자원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 자원 중에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하고, 안목이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하며, 때로는 행운(하나님의 섭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아실까요? 그것은 즐거움(기쁨)입니다. 물론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즐거움(기쁨)은 매우 중요한 신앙과 삶의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뼈가 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할 자가 없다! 는 주제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 좋은 놈 당하지 못한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돈 있는 놈 당하지 못한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즐겁게 하는 놈 당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생산되는 원천은 어디일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때, 자로 잰 듯 엄격하고,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무섭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넓은 화폭 앞에서 선 자유로운 화가와 같으시고, 수만 가지의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게 하는 감동에 젖은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지휘자 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당신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시고 진행해 나가실 때 무한한 활력과 즐거움으로 하십니다.
-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미래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의 총화를 기대하는 마음이 성취된 곳입니다. 여기서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즐거움 속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자신의 야욕과 이기적 성취를 몰아냅니다.
- 본문에서 둘째 아들은 자기 뜻으로 방황을 일으키고 근시안적 안목으로 그의 진정한 미래를 잃었습니다.그래서 그는 공허함 가운데 꾸었던 꿈 때문에 멀리 타국에 가서까지 미래를 송두리채 잃었습니다. 엄격한 의미로 자신이 꿈꾸었던 미래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야욕이었죠.
그러다가 돼지 쥐엄 열매를 먹는 고통과 고난의 바닥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지가 분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아버지와 동행하며 얻는 즐거움과 모든 의미를 배우고 살면, 자신의 삶의 내용은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행복할 것이고, 그것이 마땅히 인간이 취해야 할 미래임을 깨우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 우리는 이것이 담고 있는 교훈이 매우 영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거기가 안전하고, 풍요롭고, 편안하니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던 자는 큰 아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진정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 귀향이 언제나 항상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는 영적 귀향이 더 깊은 의미에서 깨달아지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 귀향을 이루면 진실한 미래가 약속됩니다. 시편23편 참고.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수준 높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기도: 나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나의 진정한 미래를 찾기를 기도… 미래는 그 때 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동거함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