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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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5) "잃고 또 잃을 인생 속에 심겨진 그리스도"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4
조회
1115
본문: 눅23:44-49 “잃고 또 잃을 인생 속에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
-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잃으셨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잃으셨다는 사실은 세상을 잃으셨다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됩니다. 사람과 세상을 잃고 하나님은 한탄과 외로움을 맛 보셨지만, 결코 인간과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에겐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잃으시면, 사람도 사람을 잃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잃습니다. 자기에게 가까이 두고 친밀함과 즐거움으로 다스려야 할 세상이 쟁취해야 할 욕정의 대상으로 변모되고, 자신은 거기에서 생존경쟁이라는 명목 아래 세상을 더 헤쳐 놓고 황폐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과 세상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는 나를 잃어버리고, 이웃을 잃어버리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미래와 희망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이란 총체적 난국을 벌려 놓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시고 싶은 일이 바로 사람을 되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되찾아 오시는 일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 따라서 나는 정말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었는지를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내가 어떤 것을 잃었는가를 말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 소외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외의 것들을 잃는 것에 대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소외란 쉽게 말하면 자신 안에 두 존재를 지니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겉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고 공동 생활과 사회 생활을 할 때 인위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이고, 또 하나는 속 사람으로서 진짜 자기이지만 남들에게 내보이기 싫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 입니다. 그런데 이 속 사람이 바로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을 갖게 하고, 여기서부터 자라고 성숙하여 행위로 드러내는 아름다운 열매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 언젠가부터 자라야 할 속 사람을 억압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특히 부모와 선생님)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 속에서 타인을 향한 인위적, 맞춤형 자기를 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슬프고 아파도 울어선 안 되는 나, 모래 밭을 거칠게 뛰놀고 싶고, 물 속에서 풍덩거리면서 뛰놀고 싶어도 말썽 안 부리고 점잖은 아이라고 불려져야 할 나, 이런 나는 부모나 타인으로부터 저지 받기 때문에 나를 억제하면서 맞춤형, 나의 겉 사람을 지어갑니다. 때로는 남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고 돕고 싶어도, ‘네가 그렇게 다 돕고 어떻게 살겠냐?’고 훈계를 들어서 그러한 수수한 선한 나까지도 숨겨야 하는 때가 발생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 소외를 일으키는데, 이것은 깊은 내면의 좌절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 예를들면, 아프고 슬프면 마음껏 내 속사람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따로 노는 겉 사람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기 혼자서도 마음껏 울 수가 없습니다. 겉 사람에 익숙해져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아픔과 슬픔을 털어놓을 길이 없고, 그러한 잔재들은 음으로 양으로 (쉬운 말로) 스트레스가 되어 내 마음 속에 가라앉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아프고 슬픈 현실이 가득한데, 그것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울지 못하는 자신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울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응어리진 것들이 터질 때, 불시의 격분으로, 고집으로, 때로는 남을 조정하려는 심리로 나타날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에 대한 보상을 내면에서는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Tuesdays with Mori”에서 Mori 교수님이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지만, 그는 항상 밝고, 유머가 있고, 병석에서도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고, 인생 상담을 해줍니다. 그를 사랑하는 옛 제자가 Mori 에게 묻습니다. “교수님은 이런 중병 중에서도 그렇게 밝고, 타인에게 힘을 주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매일 새벽이면 한 바탕씩 운다네… 그리고 내가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되면, 그래, 오늘을 위한 눈물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나는 또 내 삶을 살아야지”하고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울어야 할 속사람을 울도록 허락하고, 해가 뜨면, 그 속사람이 그 날 하루를 자신과 함께, 찾아주는 타인과 함께,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과 치료사들과 함께 밝고 건강한 내적 모습을 가지고 말과 표정과 행위로 그들과 아우러져 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 자기 소외가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내일 희망에 관한 말씀을 한번 더 보겠지만 자신의 삶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비극입니다. 이 비극이 당장에는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어떤 시기가 지난 후에 분명히 괴물과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괴물의 정체는 허무, 우울, 좌절, 깨어진 화목, 동기부여 제로, 끓는 짜증과 분노, 불안과 염려, 비관, 비난 등입니다. 자신이 붙드는 굳센 희망(소망)이 없으면 결코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증상들은 우리가 듣기만 해도 엄청난 고난과 고통의 현장을 이루어 놓을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자기에게 이러한 괴물의 정체가 있다고 해서 자기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옆에 사람도 함께 괴롭습니다. 우리는 모두 유기체적인 성질로 관계 맺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 속사람의 미숙과 퇴보로 말미암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과 야욕이 불러 일으킨 생존경쟁/적자생존으로 인한 세속의 물결은 세상에 거센 풍랑을 일구어 내고, 불공평한 분배와 나라 간의 전쟁, 그리고 자연 재앙까지 닥치면, 해마다 쓰나미를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즉, 세상의 고통과 고난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그림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내면과 세상의 표면에 이르기까지 가득 찬 이 고난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일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 희망을 붙들게 함으로써 펼쳐질 미래로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일을 하실 수 있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고통의 최하 지점까지 버려지고 떨어져서 그 비참함을 함께 다 맛 보시고 거기서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한 복판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를 한번 그림으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비참한 자리 중앙에 있습니다. 결코 ‘나’ 라는 인생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거나 따로 취급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세상의 표면에 이르는 모든 고난 속에 죄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의도적으로 깊이 심겨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잃었던 자신과 세상, 그리고 죄의 증상들로 말미암아 조합되고 가속되어 벌어지는 처참한 고난과 고통의 현장 속으로 스스로 빠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우리도 희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 부활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의 고난과 고통 한 복판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분의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증언합니다(롬8:34, 히7:25).
- 우리가 자기 소외라는 죄의 심각함 속에서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또 세상은 희망을 잃었습니다. 잃고 또 잃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두를 거기서 구원해내시고, 이제는 당신을 따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갖자고 하십니다. 내 자신과 세상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보면 그 희망이 진실로 생기지 않을까요? 오늘 성금요일 나의 고통 속에, 또 세상의 고통 속에 묻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시며 그 속에서 어떤 부활의 희망의 빛을 비추실까를 기대하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마음과 인생의 한 복판입니다. 고통의 중앙입니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의 빛으로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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