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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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6) "희망을 얻은 두 제자"

작성자
손민석
작성일
2015-12-07 23:35
조회
1070
본문: 눅24:13-35 “희망을 얻은 두 제자”
-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희망이 파괴된 이 땅위에서의 삶과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하고 인도할 수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한 희망이 될까요? 될 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분을 위한 희망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그 희망의 실제 힘이 모든 인간에게도 미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희망이 되어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십자가에 투신해야 한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냥 주저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희망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중함이 요구됨>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나친 낙관주의로 이끌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면 다 돼!” “예수님이 언제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거야” 이런 주장 속에 신중함과 겸허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실질적인 십자가의 능력은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장애물이 닥치면 환멸을 느끼고, 실망할 상황이 얼마든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향한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민족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엄청난 기대가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대와 소망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하고는 그들에게 예수 구원이라는 것은 말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실망한 것에 대해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24절.
그래서 이들은 가졌던 자신들의 희망을 다 던져 버리고 없던 일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안목으로 인간의 차원에서 구하고 바랄 수 있는 희망은 바로 이렇게 순식간에 버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희망이란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하는 사항에 대해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 환자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희망한다면 건강이 회복되지 않을 경우 절망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구체적 희망이 실현되지 않으니 그 절망을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병이 나아야 한다는 것과 같이 어떤 구체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을 그 어떤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말합니다.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란, 내가 받을 더 나은 생명의 내용, 하나님과 더 가까이서 누릴 수 있는 축복, 하나님어 더 기뻐하시는 자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비록 건강해지지 않아도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고, 희망 안에서 질병을 통해서도 파멸되지 않는 심오한 구원에 대한 예감이 자랄 수 있습니다.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삶과 민족의 입지가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희망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절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랬던 것 까지는 좋았는데, 자기들의 구체적 희망 사항이 성취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희망의 한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그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 희망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야 상황이 불확실하다 할지라도 내적 확신과 초연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학생들은 졸업하는 것을 희망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마땅한 일)
- 만일 이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의 지혜와 능력은 무한하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다면, 자기들이 믿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남은 기대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전능하신 하나님도 믿지 못하는 자기중심적 믿음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희망이란 상황과 조건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그 반대 상황을 맞이한다 해도 희망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감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그런 예가 될 것입니다.
- 페기(프랑스 작가) ‘희망의 신비’에서.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될 것을 보는 것이다.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될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될 것을 사랑한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 인간을 이런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의 진수를 전하시기 위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과연 진정한 희망이 어떻게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역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나타나심 속에서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초월적으로 뜨겁게 해주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희망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자신들의 케케묶은 민족주의적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초월적인 경험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point 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태도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분위기 만들고, 감정을 고조시키며, 많은 호소를 합니다만 그것에는 진정성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기서 진정성이란 사람의 진정성이 아니라, 신앙의 진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시야와 가치관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면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가? 절망과 무기력함에 빠졌어도,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면 나는 그 분과 함께 일어설 수 있음을 믿는가? 이런 태도를 지니는 것입니다.
-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한정시켜 놓은 구원의 범주 안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새 희망의 빛이 비추이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 속에서는, 희망을 갖도록 설득하는 근거보다 희망을 비관하게 하는 근거가 더 강력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의 존재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두 제자가 마음이 뜨거워져 내면이 바뀌고 변화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예수의 진정한 구원에 대해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굳건하게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기를 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변화되야 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인간이 진정한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의 특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교회 안에서 나의 인생과 세상에 대해 무엇을 희망합니까? 그 희망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초대교회 교우들에게 조차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벧전3:15에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희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 했습니다.
누군가가 분명히 우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예수 믿고 무엇을 바라며 사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당황해서 우물쭈물 하거나, 또는 세상도 바라지 않는 저수준의 것을 바란다고 하거나, 또는 허황되고 이상적인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을 바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희망에 관해 잃은 것을 아직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각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더욱 깨어나 말씀에 부딪힐 것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권면드립니다.

<기도> 우리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의 정수는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옵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쉼 없는 질문과 관심이 우리 속에 깊이 함께 하기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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